"너느 나처럼 살지말아라"-주술에 걸린 우리네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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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혹은 실제 생활에서 전세대의 어머니들은 딸들에게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했다
'너는 나처럼 살지마라'
아들들에게 성역처럼 신성한 영역으로 여기는 '어머니'들의 삶이 가슴아프고 아름다운 풍경같은 거라면
딸들에게는 그 '어머니의 삶'이 저 주문과 함께 끔찍한 악몽이자 피하고 싶은 미래로 받아들여져왔다.
'나처럼 살지마라' - 그럼 이 나처럼이란 삶은 어떤 모습일까.
배우고 싶어도 여자라서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시집가면 당연하게 그집의 귀신이 될 각오로 시집오는 그 순간부터 시집식구를 위시해서 온 가족을 위해서 하루도 허리 펼 날 없이 죽어라 일만 하고 그나마 생계를 부양하는 가장이 무능한 경우에는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온갖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생계전선에 뛰어드셔야 했으며
그에 대한 보상이란 거의 없음과 동시에 거기에 때때로 험한 인격적 모독과 육체적 폭력이 가해져도
'여자로 사는 게 원래 그래'란 체념섞인 어조로 포기해버린 삶.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컸을 딸들에게 그 삶은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있어서 같은 성(性)을 가진 부모쪽이 '롤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포감은 막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이 딸들의 소위 '피해의식'이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한 토양에서 뿌리내린 강력한 독초인 공포심인 것이다.
이 공포심 위에 뿌려진 주문
'너는 나처럼 살지마라'
이 주문은 딸들에게 강력한 주술을 걸어버린다.
'희생하지 마라. 희생은 너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이해하나 '피해의식'이란 결국 인간이 스스로 극복해내야 하는 자기자신의 걸림돌이란 점도 분명하다.
어머니 세대들에게 있어 그 피해의식은 실체를 가진 피해에서 비롯된 의식이지만, 현재 그 딸세대에게도 그 의식이 실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재고해봐야 한다.
물론 그 실체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그 실체가 사라진 후에도 유령처럼 떠돌아서 하나의 '터부'로 작용하고 있는 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머니들의 주문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나처럼 살지마라' 이 말이 곧 '희생하지말고 살아라'란 뜻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희생은 희생한 당사자를 참담하게 하지만
가족이란 관계는 서로 조금씩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희생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어머니'란 자리는 단순한 가사노동자의 자리가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써 자리잡기 위해 페미니즘이 '무가치한 노동'으로 규정해버린 부엌은
여전히 가족이 전쟁터같은 가정밖의 삶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기 위해 돌아오는 가정의 가장 근본적인 터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안아줄 어머니가 필요하다.
'남자'란 대명사로 관념화 되버리면 무차별한 폭압자이자 기득권자가 되버리는 아버지들 역시 껍데기만 남은 권위의 '가장'이란 이름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되본 적도 없는 기득권자이자 가해자로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
그들의 아들인 우리의 남자형제들은 지금은 너무나 초라해졌지만 그 책임의 무게는 조금도 줄지않은 '가장'이란 굴레를 짊어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이 그 이름을 물려받아야하는지 고민하면서도
'사내새끼가...'하는 통념에 의해 그 두려움과 부담을 지금까지 입밖에 꺼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면서 살아왔다.
사회는 어떤가?
물론 아직도 그대가 여자라서 사회는 그대를 조금 깔본다.
그러나 어머니 세대를 짓누르던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폭압에 가까운 차별들은 '거대한 형체'란 점에선 대부분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들은 오히려 추상적인 관념에 의한 차별에 더 가깝다.
그러한 차별들은 국가나 어떤한 조직이 '거대한 형체'와 맞서서 제거해줘야 하는 차별과는 다르다.
그러한 차별들은 자기자신의 그런 관념의 반증이 됨으로써 사라지는 차별이다.
이말은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이런 차별을 없애주세요..착한 애가 될께요'하고 기다리고 앉아서 '나를 차별하지 마세요!'하고 말만 하는 이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차별의 유일한 상대자는 '당신 자신의 존재'뿐이다.
그 차별의 힘이 되는 '여자는 그래..'란 관념에 대해 당신 자신이 비웃음이 되주면 해결이 되는 것이지 '여성부'가 와서 없애줄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대가 영리한 척 이기적으로 굴면 굴수록 그 차별을 이루고 있는 관념들은 괴물처럼 거대해질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모두가 야근도 불사하고 상사에게 상소리 들어가면서 일하는 와중에 유유히 화장고치고 퇴근하면서
'회사에 그렇게 충성하는 건 바보짓이야'
중얼거리는 순간 편견은 그 힘을 더해간다.
그러한 당신의 근무태도를 지적하는 남자직원이나 상사에게
'지금 제가 여자라서 차별하시는 거에요!'
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여자동료들과 앞으로 들어올 여직원들에게 '더 거대해진 편견'을 선물하시게 된 것이다.
'희생'과 '회사가 당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분명 다른 것이다.
정신 좀 차리고 영리해져라.
'나처럼 살지마라'
이말은 못배우고 몰라서 힘없어서 당하고 살지말라는 의미지
최대한 이기적으로 요만큼도 손해보고 살지말란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도 우리가 실체가 없는 '피해의식'의 노예로 당연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나 스스로 반증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의 '성(姓)'을 물려받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잘못 이해되어 물려진 주문의 주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너는 나처럼 살지마라'
아들들에게 성역처럼 신성한 영역으로 여기는 '어머니'들의 삶이 가슴아프고 아름다운 풍경같은 거라면
딸들에게는 그 '어머니의 삶'이 저 주문과 함께 끔찍한 악몽이자 피하고 싶은 미래로 받아들여져왔다.
'나처럼 살지마라' - 그럼 이 나처럼이란 삶은 어떤 모습일까.
배우고 싶어도 여자라서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시집가면 당연하게 그집의 귀신이 될 각오로 시집오는 그 순간부터 시집식구를 위시해서 온 가족을 위해서 하루도 허리 펼 날 없이 죽어라 일만 하고 그나마 생계를 부양하는 가장이 무능한 경우에는 자식들 입에 밥을 넣어주기 위해 온갖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생계전선에 뛰어드셔야 했으며
그에 대한 보상이란 거의 없음과 동시에 거기에 때때로 험한 인격적 모독과 육체적 폭력이 가해져도
'여자로 사는 게 원래 그래'란 체념섞인 어조로 포기해버린 삶.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컸을 딸들에게 그 삶은 아주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있어서 같은 성(性)을 가진 부모쪽이 '롤모델'이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포감은 막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이 딸들의 소위 '피해의식'이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한 토양에서 뿌리내린 강력한 독초인 공포심인 것이다.
이 공포심 위에 뿌려진 주문
'너는 나처럼 살지마라'
이 주문은 딸들에게 강력한 주술을 걸어버린다.
'희생하지 마라. 희생은 너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이해하나 '피해의식'이란 결국 인간이 스스로 극복해내야 하는 자기자신의 걸림돌이란 점도 분명하다.
어머니 세대들에게 있어 그 피해의식은 실체를 가진 피해에서 비롯된 의식이지만, 현재 그 딸세대에게도 그 의식이 실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재고해봐야 한다.
물론 그 실체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떠한 것들은 그 실체가 사라진 후에도 유령처럼 떠돌아서 하나의 '터부'로 작용하고 있는 면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머니들의 주문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나처럼 살지마라' 이 말이 곧 '희생하지말고 살아라'란 뜻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희생은 희생한 당사자를 참담하게 하지만
가족이란 관계는 서로 조금씩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희생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어머니'란 자리는 단순한 가사노동자의 자리가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써 자리잡기 위해 페미니즘이 '무가치한 노동'으로 규정해버린 부엌은
여전히 가족이 전쟁터같은 가정밖의 삶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기 위해 돌아오는 가정의 가장 근본적인 터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안아줄 어머니가 필요하다.
'남자'란 대명사로 관념화 되버리면 무차별한 폭압자이자 기득권자가 되버리는 아버지들 역시 껍데기만 남은 권위의 '가장'이란 이름 때문에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되본 적도 없는 기득권자이자 가해자로 초라하게 늙어가고 있다.
그들의 아들인 우리의 남자형제들은 지금은 너무나 초라해졌지만 그 책임의 무게는 조금도 줄지않은 '가장'이란 굴레를 짊어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이 그 이름을 물려받아야하는지 고민하면서도
'사내새끼가...'하는 통념에 의해 그 두려움과 부담을 지금까지 입밖에 꺼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면서 살아왔다.
사회는 어떤가?
물론 아직도 그대가 여자라서 사회는 그대를 조금 깔본다.
그러나 어머니 세대를 짓누르던 개인이 대항할 수 없는 폭압에 가까운 차별들은 '거대한 형체'란 점에선 대부분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들은 오히려 추상적인 관념에 의한 차별에 더 가깝다.
그러한 차별들은 국가나 어떤한 조직이 '거대한 형체'와 맞서서 제거해줘야 하는 차별과는 다르다.
그러한 차별들은 자기자신의 그런 관념의 반증이 됨으로써 사라지는 차별이다.
이말은 반대로 말하면 '누군가 이런 차별을 없애주세요..착한 애가 될께요'하고 기다리고 앉아서 '나를 차별하지 마세요!'하고 말만 하는 이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차별의 유일한 상대자는 '당신 자신의 존재'뿐이다.
그 차별의 힘이 되는 '여자는 그래..'란 관념에 대해 당신 자신이 비웃음이 되주면 해결이 되는 것이지 '여성부'가 와서 없애줄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대가 영리한 척 이기적으로 굴면 굴수록 그 차별을 이루고 있는 관념들은 괴물처럼 거대해질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당신이 모두가 야근도 불사하고 상사에게 상소리 들어가면서 일하는 와중에 유유히 화장고치고 퇴근하면서
'회사에 그렇게 충성하는 건 바보짓이야'
중얼거리는 순간 편견은 그 힘을 더해간다.
그러한 당신의 근무태도를 지적하는 남자직원이나 상사에게
'지금 제가 여자라서 차별하시는 거에요!'
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여자동료들과 앞으로 들어올 여직원들에게 '더 거대해진 편견'을 선물하시게 된 것이다.
'희생'과 '회사가 당신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분명 다른 것이다.
정신 좀 차리고 영리해져라.
'나처럼 살지마라'
이말은 못배우고 몰라서 힘없어서 당하고 살지말라는 의미지
최대한 이기적으로 요만큼도 손해보고 살지말란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도 우리가 실체가 없는 '피해의식'의 노예로 당연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나 스스로 반증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의 '성(姓)'을 물려받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잘못 이해되어 물려진 주문의 주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댓글목록
multiuser3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맞는 말씀...공감200%
multiuser3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
이제 모두 취침하러 가셨나봐....
이제 돌아왔는데...
파라님~~~~
퓨쳐님~~~
ktfuture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
멀티님 저 왜찾으세여?
저 여깄는데.. ^^ㅋ
긍데 파라님이랑 같이
찾아서 살짝 기분나빴오~
쿠.. 쿠.. 쿸.. ^^ㅋ
multiuser3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
열두시에 찾앗는데 이제오시남.....ㅜㅜ
짐은 다 싸셨나여?
파라님 찾은 건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서리....
우린 동지자누...
나파라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시원님..저 처럼 사세요~~^^*
genial님의 댓글의 댓글
익명 작성일음......